기차가 청평역을 지나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좌석 등받이를 한껏 눕히고 얼굴 가득 세차게 몰아치는 눈발을 맞았다.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은 박현수의 <세한도>였다. 밤새 몇 번을 반복해 암송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시작(詩作)은 절망적이었다. 반반한 겨울 외투 하나 없던 나는 아버지의 코트를 꺼내 입고 춘천행 기차에 올랐다. 춘천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소양강댐까지 달려갔다. 다시 배로 갈아타고 걸어 도착한 청평사. 회전문 앞에는 키가 큰 나무 두 그루인가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소나무였을까, 잣나무였을까. 그렇게 하염없이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 있었다. 이후 꽤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고, 못했고 그해 여름 후두둑 머리를 깎고 군입대를 하였다. 30년 전 온몸을 두들겨 대던 그 시퍼런 눈발들이 지금 몹시도 그립다. 다시 눈발들을 데리고 세한도의 구도를 찾아 떠날 수 있을까. 겨울을 위하여 나는 이미 멀리 떠나있는 듯 하다.
*박현수, <세한도> 중에서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중 詩作메모 (「文學과知性」 詩人選 80, 文學과知性社,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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