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훨훨 떨치고 나그네 길에 오르면 유행가의 가사를 들출 것도 없이 인생이 무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자신의 그림자를 이끌고 아득한 지평(地平)을 뚜벅뚜벅 걷고 있는 나날의 나를 이만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구름을 사랑하던 헤세를, 별을 기리던 쌩 떽쥐뻬리를 비로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낯선 고장을 헤매노라면 더러는 옆구리께로 허허로운 나그네의 우수(憂愁)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간다.
...
나그네 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내 속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이 단순한 취미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자기 정리(自己整理)의 엄숙한 도정(道程)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법정, '나그네 길에서' (「무소유」. 범우사. 1990 증보판)
728x90
반응형
'창고, 빛나는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 최순우 에세이 <부석사 무량수전> :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 (0) | 2022.10.02 |
---|---|
문학. 함민복 詩 <뻘에 말뚝 박는 법> : 좌우로 또는 앞뒤로 (0) | 2022.07.05 |
문학. 전각 혜심 禪詩 <못을 거닐며> : 시를 읊으며 홀로 배회하네 (0) | 2022.05.20 |
문학. 곽재구 詩 <목련사설-김광석을 위하여> : 무슨 잠이 이리도 깊으냐 (0) | 2022.05.14 |
문학. 황지우 詩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0) | 2022.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