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고, 빛나는 것들

문학. 도종환 <희망> : 꽃이 꽃에 닫는 느낌으로

by 강진호프 2022. 3. 6.
728x90
반응형

 

 

 

 

 

 

 

 

그대 때문에 사는데

그대를 떠나라 한다

 

별이 별에게 속삭이는 소리로

내게 오는 그대를

꽃이 꽃에 닿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대를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고

사람들은 내게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돌아섰듯이

알맞은 시기에 그대를 떠나라 한다

 

그대가 있어서

소리없는 기쁨이 어둠속 촛불들처럼

수십개의 눈을 뜨고 손 흔드는데

 

차디찬 겨울 감옥 마룻장 같은 세상에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

한장의 얇은 모포 같은 그대가 있어서

아직도 그대에게 쓰는 편지 멈추지 않는데

 

아직도 내가 그대 곁을 맴도는 것은

세상을 너무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

사람 사는 동네와 그 두터운 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모든 아궁이가 스스로 불씨를 꺼버린 방에 앉아

재마저 식은 질화로를 끌어안고

따뜻한 온돌을 추억하는 일이라 한다

 

매일 만난다 해도 다 못 만나는 그대를

생에 오직 한번만 만나도 다 만나는 그대를 

 

-도종환, 희망 (「부드러운 직선」 창작과비평사. 1998)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