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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빛나는 것들

문학. 신영복 <빼어남보다 장중함 사랑한 우리 정신사의 지리산-남명 조식을 찾아서> :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

by 강진호프 2022.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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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빼어나긴 하나 장중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고 합니다

금강산은 그 수려한 봉우리들이 하늘에 빼어나 있되 장중한 무게가 없고, 

반면에 지리산은 태산부동의 너른 품으로 대지를 안고 있되 빼어난 자태가 없어 아쉽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해발 2천여 미터의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보이는 덕천강가에는 

지리산만큼 무거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대답이 없는 고고한 선비 남명 조식의 산천재가 있습니다

퇴계와 더불어 영남유학의 쌍벽이었으되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지리산 자락에 은둔하였던 남명은

한 시대의 빼어난 봉우리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정신사에서 그의 위상이 차지하는 무게는 가히 지리산의 그것에 비길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지론을 거침없이 갈파한 남명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은 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오리들을 질타하였습니다

...

돌아오는 길에 거창에 들러 거창고등학교를 찾았습니다

휴일이라 인적도 없는 교정을 돌아보다가 강당의 벽면에 다음과 같은 직업선택의 십계를 발견하였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한 시대의 빼어남을 지향하는 길을 가지 말고 장중한 역사의 산맥 속에서 익어가는

숯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기계의 부품이 되지 말고 싱싱한 한 그루 나무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는 지리산의 장중함이면서 동시에 남명의 철학이었습니다.

 

-신영복, '빼어남보다 장중함 사랑한 우리 정신사의 지리산-남명 조식을 찾아서'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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