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당신께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전부터 나는 당신께 한 번쯤 소리나는 대로 편지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막걸리 먹고 취한 사내의 육자배기 가락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내게 무슨 깊은 한이 있어 그런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매양 또 주저하다가 세월만 흘려보낼 것 같아 딴에는 작정을 하고 쓰는 셈입니다.
선운사에 내려온 지 오늘로 꼭 나흘째입니다. 이곳은 미당을 길러낸 땅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죠. 굳이 따지자면 당신 고향이 미당의 고향보다 선운사에서 보면 훨씬 가깝지요. 짐작하시겠지만 형편이 좋아 관광을 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열흘 전, 실로 7년만에 당신과 해후했을 때 당신은 내게 벚꽃 얘기를 하셨습니다. 4월 말쯤 벚꽃이 피면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남으로 내려가 벚꽃을 몰고 등고선을 따라 죽 북향할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개화 남쪽 지점을 당신의 고향으로 정한 겁니다. 이곳 선운사는 10년 전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 아닙니까.
(... 중략 ...)
아주 오랜만에 써보는 편지니 군데군데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더라도 행여 접지 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벚꽃이 피는 날까지 천천히 써나갈 생각입니다. 실은 엊그제부터 쓰고자 했는데, 말문이 트이지 않아 얼굴을 납작하게 종이에 댄 채 하냥 풀 먹는 짐승처럼 코만 킁킁거리고 있었습니다.
(... 중략 ...)
그래? 그럼 동백은 폈던가? 라고 눈을 가늘게 뜨고 물으셨습니다
"아직 안 피었습니다."
...
"음, 그래? 하지만 나는 벌써 보고 가네."
(... 중략 ...)
나는 차마 벚꽃을 보러 왔다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 이래저래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상에 놓여 있는 더덕구이, 산초 열매, 가죽나뭇잎 볶음과 도토리묵 등을 들어보라시며 반찬 접시를 자꾸 제게 밀어놓으셨습니다. 술을 드시면서도 선생은 아마 동백을 보고 계셨는지 모릅니다. 나는 보지 못하고 그저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벚꽃 말이지요.
(... 중략 ...)
"선운사가 백제 때 지어졌으니 만세루도 아마 같이 맨들어졌겄지. 그러다 고려 땐가 불에 타버려 다시 지을라고 하는디 재목이 없더란 말씀야. 그래서 타다 남은 것들을 가지고 조각조각 이어서 어떻게 다시 맨들었는디 이게 다시없는 걸작이 된 거지. 일본의 무슨 대학교순가 하는 사람도 여기 와서 이걸 보고는 척 알아냈어. 불심으로 치자면 도대체 이런 불심이 어딨냐는 거야. 그래서 이렌가 여드렌가를 여기 묵으며 날마다 만세루에 가서 절을 하다 갔더란 말씀야."
(... 중략 ...)
선생의 말씀대로 만세루는 타고 남은 것들을 조각조각 잇대고 기운 모양으로 대웅전 앞에 장엄하게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어느 기둥 하나 그야말로 온전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사위가 어두워진 경내에서 나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서 있었지요. 뭇사람들이 무심할 리 없듯이 뭇 사물도 무심히 보면 그저 안 보이고 마나 봅니다. 캄캄한 어둠 속, 어쩐지 환해진 마음으로 경내를 돌아 나오다 나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흘끗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게 됩니다. 만세루 안에 하얗게 흐드러져 있는 벚꽃의 무리를 말입니다.
(... 중략 ...)
선운사 경내는 영산전 목조삼존불에서 퍼져 내린 향내로 이틀이나 내내 신비한 빛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 향내에 발목을 묻고 나는 생각했지요. 이제 우리는 가까이에선 서로 진실을 말할 나이가 지났는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대해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 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
오늘 벚나무 길에서 보니 며칠 안짝이면 꽃망울이 터질 듯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처럼 꽃을 보러 온 이를 만나 만세루 얘기를 들은 것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그날 내가 보았듯이, 벚꽃도 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게 당장일 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만 접습니다. 처음 쓰고자 했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소리도 너무 요란하고 더군다나 금방 읽기에는 길고 지루한 편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추신
아, 그리고 인옥이 형이 그날 당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 오늘 벚나무 길 좌판의 어떤 아주머니한테서 동백기름 한 병을 샀습니다. 나중 어느 날이라도 생각이 변하고 마음이 바뀌면 머리에 한번 발라보라고 말입니다. 당신 앞산에 벚꽃이 피면 그때 찾아가서 놓고 오지요.
- 윤대녕, <상춘곡 1996> 중에서 (「문학동네」 7호. 1996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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