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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검은잎3

12화. 집으로 가는 길 강진을 떠난 버스*는 바로 고속도로에 오르지 않고 국도를 따라 북진한다. 단아한 절집 무위사를 품은 성전을 지나 영암을 들어서서 마주하는 월출산의 모습은 웅장하기 이를 데 없어 눈을 떼기가 힘들다. 월출산이 물러나고 버스는 영산포를 지나 나주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곰탕집들이 지척인데, 잘 삭힌 홍어 한 점에 막걸리 한 모금이면 입안은 천국이지. 언제 한번 쉬어가도 좋겠는데. 빛고을 광주를 서쪽으로 에둘러 달리던 버스는 옐로우시티 장성을 지나며 황룡강을 건넌다. 장성물류IC에서 올라선 길은 고창담양고속도로로 이어지고 찬란하던 세상은 이윽고 빛을 잃는다. 부안을 지날 때면 그 자리를 가늠해보는 백산은 그 모습 그대로 잘 있겠지.** 징게맹게 너른 들과 채만식의 가 흘러들던 군산도 몇 개의 불빛으로 흐른다. .. 2023. 1. 21.
문학. 기형도 詩 <밤눈> :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일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기형도, '밤눈'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2023. 1. 12.
11화. 세한도(歲寒圖) 기차가 청평역을 지나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좌석 등받이를 한껏 눕히고 얼굴 가득 세차게 몰아치는 눈발을 맞았다.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은 박현수의 였다. 밤새 몇 번을 반복해 암송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시작(詩作)은 절망적이었다. 반반한 겨울 외투 하나 없던 나는 아버지의 코트를 꺼내 입고 춘천행 기차에 올랐다. 춘천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소양강댐까지 달려갔다. 다시 배로 갈아타고 걸어 도착한 청평사. 회전문 앞에는 키가 큰 나무 두 그루인가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소나무였을까, 잣나무였을까. 그렇게 하염없이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 있었다. 이후 꽤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고, 못했고 그해 여름 후두둑 머리를 깎고 군입대를 하였다. 30년 전 온몸을 두들겨 대던 그 시.. 2022.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