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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빛나는 것들25

시를 읽는 오후 :: 이성복, 서해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 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이성복, 서해 (, 문학과지성사, 1990) 2023. 7. 2.
영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카모메식당> :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뿐이에요 미도리 : 짐은 아직 못 찾으셨어요? 마사코 : 네, 아침에도 확인했어요. 커피 주세요. 사치에 : 네. 사치에 : (커피를 들고 오면서) 중요한 물건도 들었을 텐데 큰일 이네요. 마사코 : 중요한 물건이라 ······ 뭐가 들어 있었더라. (생각에 잠기는 듯) 사치에 : 갈아입을 옷은 있으세요? 미도리 : 제 옷이라도 빌려 드릴까요? 마사코 : 신경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사치에 : 아니에요. 마사코 :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맛있어요. 사치에 : 고맙습니다. 마사코 : (실내를 둘러보고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두 분은 어쩌다 여기서 가게를 열게 됐어요? 미도리 : 저는 그냥 도울 뿐이에요. 가게는 사치에 씨가 ······ 사치에 : 저는 멋있는 남자 만나려고요, 농담이에요. (웃는다) 마사코 : 좋.. 2023. 1. 16.
문학. 기형도 詩 <밤눈> :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일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기형도, '밤눈'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2023. 1. 12.
드라마. 박해영 극본 김원석 연출 <나의 아저씨> (제8회) :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동훈 :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해야 하는 거야. 아파트는 평당 300kg 하중을 견디게 설계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나 강당은 하중을 훨씬 높게 설계하고, 한 층이라도 푸드코트는 사람들 앉는 데랑 무거운 주방 기구 놓는 데랑 하중을 다르게 설계해야 되고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지안 : 인생의 내력이 뭔데요? 동훈 : (한숨) 몰라. 지안 : 나 보고 내력이 세 보인다면서요. 동훈 : 내 친구 중에 정말 똑똑한 놈이 하나 있었는데, 이 동네에서 정말 큰 인물 하나 나오겠다 싶었는데, 근데 그 놈이 대학 졸.. 2022. 10. 10.
가요. 정훈희 송창식 <안개> (영화 '헤어질 결심' ost) :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다오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 정훈희 송창식 '안개' 일부 (영화 OST 중에서) 2022. 10. 5.
영화. 홍성은 감독 <혼자 사는 사람들> :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회사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신입사원 수진이 우수사원 진아 옆에 앉아 교육을 받고 있다. 뚜-뚜- 들려오는 통화연결음) 수진 :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이비카드 상담원 박수진입니다. 고객 : 아, 네, 안녕하세요. 박수진 상담원님. 그, 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수진 : 아, 네, 말씀하세요. 고객 : 아, 이걸 제가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될지 모르겠는데 .. 어 ..실은 제가 타임머신 하나를 만들었거든요. 수진 : 아 .. 네 .. 고객 : 어, 근데 제가 이걸 타고 2002년으로 가려고 하는데, 현금이 너무 무거우니까 카드를 들고 가면 좋잖아요. 수진 : 네, 그렇죠. 고객 : 어, 제가 이걸, 거기 가서 쓸 수 있을까요? 아,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라요, 이거 저한테 너무 중요한 문제거든.. 2022. 10. 4.
문학. 최순우 에세이 <부석사 무량수전> :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 최순우,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신서1 1994) 2022. 10. 2.
문학. 함민복 詩 <뻘에 말뚝 박는 법> : 좌우로 또는 앞뒤로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 말이나 큰 말 잡아 줄 써개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로우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넝쿨을 걸고 물고기 열매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 함민복, '뻘에 말뚝 박는 법' ( 문학세계사 2005) 2022. 7. 5.
문학. 법정 <나그네 길에서> : 그림자를 이끌고 아득한 지평을 뚜벅뚜벅 걷고 있는 훨훨 떨치고 나그네 길에 오르면 유행가의 가사를 들출 것도 없이 인생이 무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자신의 그림자를 이끌고 아득한 지평(地平)을 뚜벅뚜벅 걷고 있는 나날의 나를 이만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구름을 사랑하던 헤세를, 별을 기리던 쌩 떽쥐뻬리를 비로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낯선 고장을 헤매노라면 더러는 옆구리께로 허허로운 나그네의 우수(憂愁)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간다. ... 나그네 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내 속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이 단순한 취미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자기 정리(自己整理)의 엄숙한 도정(道程)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 2022. 5. 31.
문학. 전각 혜심 禪詩 <못을 거닐며> : 시를 읊으며 홀로 배회하네 미풍이 솔바람을 깨우자 고요하고 청정한 슬픔이 이네 마음 물결 위에 달빛이 어려 맑고 맑아 티끌이 없네 보고 듣는 것이 너무나도 상쾌하여 시를 읊으며 홀로 배회하네 시흥(詩興)이 다하여 조용히 앉으면 내 마음은 차가워 불 꺼진 재와 같네 -전각 혜심 (「선시-석지현 엮고 옮김」 현암사 2019 3쇄) 2022. 5. 20.
문학. 곽재구 詩 <목련사설-김광석을 위하여> : 무슨 잠이 이리도 깊으냐 목련꽃이 피던 삼월이었다네 광주일고 동창생 몇 모여 꽃향기 마셨다네 죽은 광석이 생각 불현듯 떠올라 소줏잔 나누다 말고 광석이 고향집 찾았다네 해남군 제곡면 방춘리 텅 빈 세칸 집은 낡고 쓸쓸하여 방금 분 봄바람에 쓸려 날아갈 것만 같았다네 곡수 받던 사람들 광석이 이야기에 눈물 글썽이네 그 자석 세상 효자고 수재였는디 앞산 뒷산 뭉게구름 산그늘도 가슴 울먹였다네 광석이 엄니 정리댁 소주 서 말 한숨에 마셨다네 울면서 지아비와 험한 세상 버리자고 군대 있던 작은 아들 면회하고 열차에서 뛰어내렸다네 아이고 아이고 무정한 세상 죽음조차 뜻대로 안되는구나 금촌 도립병원에서 정리댁 아들 대신 살아났다네 아들 모습 남아 있는 고향땅엔 돌아갈 수 없어 아픈 다리 두들겨 패며 임진강 건넜다네 그곳 지뢰밭에 논농사 부.. 2022. 5. 14.
문학. 황지우 詩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주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 2022. 5. 6.